연세대에서 4번에 걸친 세미나로 진행하는 '기후위기, 무엇이 문제이고 대안은 무엇인가?'에서 첫째로 발표한 자료입니다.
참석자들에게 사전에 배포한 읽을거리는 이 링크에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오늘 제 발제는 이 3개의 빈칸을 채우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자본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혁신과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많이들 들어 보셨죠? 기업들이 경쟁 과정에서 신기술을 개발해서 효율화를 이루고, 그것이 기업 당사자와 소비자에게도 모두 이롭다는 이론입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녹색자본주의론입니다.
물론 녹색자본주의론이 하나는 아닙니다. 하나이기는커녕 매우 다채롭습니다. 크게 분류하면 그 안에서도 좌우가 갈리는데,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로 유명한 빌 게이츠처럼 기업을 지원하고 세금을 깎아줘 시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자는 쪽도 있고, 한국의 정의당이나 해외의 좌파 정당들처럼 그린 뉴딜을 통해 정부가 주도하자는 쪽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자본주의가 혁신과 효율적이라는 전제를 공유합니다.
자본주의에서 혁신이 일어나기는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단서가 붙죠. 바로 이윤을 남기는 혁신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 동네 병원에 가던 중 그 계단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에는 "지금은 탄소배출권 투자 시대"라고 써 있었습니다. 탄소배출권에 투자하면 더 큰 돈을 돌려받는다는 것이죠. 탄소 배출을 줄이려면 돈을 들여야 할 텐데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요? 바로 탄소배출권 가격이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에 시세차익을 벌자는 것입니다. 탄소가 실제로 줄어드는지는 관건이 아닙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많은 혁신은, 건물 계단에 굴러다니는 광고지보다는 더 나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같습니다. 탄소 배출을 실제로 줄일지 여부보다 이윤을 남기는 게 목적이라는 본질 말입니다.
제 나이가 별로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많아진 지난 20년 동안 청년기를 보낸 덕분에 꽤 많은 혁신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뜨아! 했던 혁신 중 하나는 셰일가스입니다.
제가 대학생일 때만 하더라도 이제 석유가 곧 고갈날 것이고 그래서 좋든 싫든 태양과 풍력 등 재생가능에너지가 대세가 될 것이라는 전망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술 혁신이 일어나서 셰일가스, 셰일오일이 나왔습니다. 신공법으로 추출 원가를 낮춰, 과거라면 쓰지 않았을 화석연료까지 뽑아서 쓰는 것입니다. 분명 혁신은 혁신이지만, 기후 위기 관점에서는 완전히 반대 방향의 혁신이죠.
친환경을 표방하는 혁신도 물론 있습니다. 전기차가 대표적이죠. 과거보다 주행 연비도 좋아졌고 배터리 기술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나눠드렸던 자료에 쓰여 있듯이 전기차는 수송 부문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론에서 보고듣는 친환경 기술의 상당부분은 전기차나 관련 부품인 배터리나 반도체 얘기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가장 많은 돈이 몰리고 있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전기차나 배터리는 그 자체로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지 않습니다. 전기차를 타더라도 그 전기를 석탄이나 가스를 태워서 만들면 전기차는 전혀 친환경이라 할 수 없습니다. 과학의 관점에서라면 그 많은 전기차 투자가 과연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것이냐고 물어야 할 것이고 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친환경이라서 돈이 몰린다기보다는 돈이 몰리기 때문에 친환경이라고 포장되고 있다는 말이 진실에 더 가깝습니다.
다음은 태양과 풍력 발전 비율입니다. 물론 늘고는 있지만 충분히 빠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태양과 풍력 발전 비율이 늘고 있는데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은 전혀 줄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것, 바로 화석연료 발전을 폐쇄하는 것, 대중교통을 늘리는 것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제가 20대일 때 얘기를 하자면, 그 때만 해도 풍력이나 태양 발전이 화석연료를 대체하지 못하는 이유가 킬로와트당 단가에서 석유나 가스보다 비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는 그 이유가 타당하지 않은데도 여전히 화력발전소 투자가 늘고 있습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대대적으로 늘고 있죠.
대중교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에 많은 혁신이 있지만 대중교통 수송률을 늘리는 혁신은 사실상 보기 힘듭니다. 그 이유는 자동차 기업들이 주요국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나눠드린 자료에 보면 부동산 얘기도 나옵니다. 물론 IPCC가 "부동산"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고 에너지 효율이 높은 집을 보급해야 한다고 말했죠.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이든 영국이든 중국이든 글로벌 현상은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서민들은 집을 구하기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진은 2019년 홍콩 시민들이 중국 공산당에 반기를 들었을 때 화제가 된 사진인데 홍콩 서민들의 집입니다. '이런 생활을 하니 불만이 안 생길 수가 있겠냐' 하면서 공유했었습니다.

여러분 맹점이라는 말 아시죠? 영어로는 블라인드 스팟. 분명 있는데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된다는 것이죠. 화력발전 폐쇄, 대중교통 보급, 부동산 ― 이 세 가지는 지난 20년간 자본주의가 이룩한 그 많은 혁신이 하나같이 비켜 갔고 그래서 맹점이라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빈 칸은 이것입니다: 자본주의의 혁신과 '보이지 않는 손'은 번번이 실패해 왔다.

지금까지는 자본주의를 시장과 혁신이라는 관점에서만 다뤘는데, 사실 저는 자본주의가 그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는 체제입니다. 즉, 모든 일에 영향을 끼칩니다.
온실가스 감축 문제를 봅시다. 너무 오래 전 얘기일 수도 있지만, 2007년에 유엔 IPCC가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이과대학 지구환경연구소 소속이었던 저는 정말이지 기뻤습니다. 그 해 저는 세계에서 기후과학자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미국 지구물리학회AGU에 참석했는데 엄청난 낙관을 몸소 느꼈습니다. 마침내 기후 과학이 정치권과 기업 로비를 뚫고 승리했다고 생각했고 이제 100퍼센트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대대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노력이 뒤따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다시 봅시다.

2008~2009년에 잠시 줄었으니까 정부가 일을 한 것일까요? 불행히도 아닙니다. 2008년 미국에서 리만브라더스라는 금융회사가 파산하면서 세계 경제가 급냉각한 것이었습니다. 유튜버 슈카월드는 이러게 표현했더군요. “세계 경제가 파멸한 날”
이게 왜 중요할까요? 이 사건 이후 기후 위기 대응이 언론에서 싹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기후과학이 순 사기극이라는 주장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습니다. 마치 집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바퀴벌레가 다시 나타난 것처럼 싫었습니다.
앞서 제가 경악스런 혁신으로 소개했던 셰일가스가 바로 이 시기에 부상했습니다. 미국은 경제 위기와 이라크 전쟁에 실패한 상황에서 국제 경쟁력을 위해 셰일가스에 국가적으로 투자했습니다. 태양과 풍력 발전으로 서둘러 전환해도 모자랄 판에 신종 화석연료 채굴에 막대한 돈을 지원했습니다.
이것이 실제 자본주의의 모습입니다. 완전 경쟁 시장이나 혁신과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은 경제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론이고, 실제 자본주의는 온갖 위기가 벌어지고 기후 문제에서는 그런 위기들이 테슬라의 전기차나 애플의 RE100보다 훨씬 영향을 크게 끼칩니다.
또 다른 위기를 들어봅시다.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입니다.
코로나19는 2가지를 보여 줬습니다. 첫째, 온실가스 감축은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혹시 부모님께서 가게를 운영하시는 분이라면 지난 3년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경제가 쪼그라 들었음에도 온실가스는 위의 저 그림에서 보듯 겨우 저만큼 줄었습니다. 겨우 저만큼 줄이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과학이 요구하는 감축량은 무려 이만큼입니다. 즉, 코로나19를 보면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온실가스를 줄이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가 보여 준 또 한 가지는 이 체제, 자본주의 체제의 무능함, 비효율입니다. 코로나19 백신이 2021년 상반기에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했을 때 특허를 오픈해서 전 세계에서 동시에 생산했더라면 코로나는 훨씬 일찍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랬으면 인명도 수억 명을 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코로나19가 보여 준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제협력이 아주 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후위기 대응만큼 가장 포괄적인 국제 협력을 요구하는 것도 없습니다.
코로나19 다음에는 더 나쁜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바로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간의 이른바 신냉전입니다. 더 나쁘다는 것은 총으로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의미도 있지만, 온실가스 감축 논의가 싹 밀려났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그 전까지는 그레타 툰베리랑 악수라도 하려고 시늉했던 정치인들이 이제는 에너지 안보를 외치면서 화력발전소 건설, 심지어 석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풍력과 태양 발전에 돈을 퍼부어도 시간이 모자랄 마당에 다시 한 번 화력발전소 건설에 막대한 돈이 투자되고 있습니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2020년 코로나 위기,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이 세 가지는 자본주의가 낳는 위기들이고, 당연히 기후 변화 대응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녹색자본주의가 대안인가를 따지려면 단지 경제학 교과서만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되고 자본주의의 실제 모습에 비춰 따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으로 둘째 빈칸을 채울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시장뿐 아니라 공황, 코로나, 전쟁 등 각종 위기까지 포함한다.

여기서 중간 정리를 해 보죠.
- 자본주의의 혁신과 '보이지 않는 손'은 번번이 실패해 왔다.
- 자본주의는 시장뿐 아니라 공황, 코로나, 전쟁 등 각종 위기까지 포함한다.
이 모든 폐단의 원인을 설명하는 방식이 전혀 다른 버전으로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편리함과 욕망을 추구한 탓에 기업과 정부가 그렇게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주장이 “전 세계가 한국인처럼 살려면 지구가 한 개로는 부족하다”는 주장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너무 많이 먹고, 쓰고, 플러그 안 뽑고 다니고, 에어컨을 너무 빵빵 틀어대서 기후위기의 공범이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너무 “풍족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들 중 기후나 환경 운동에 비교적 몸담았던 분이라면 저런 생각이 낯설지 않을 것이에요. 반대로 그런 경험이 없으시다면 아주 황당하실 것입니다: "요즘 같은 고물가, 짠테크하는 내 모습에 처량함을 느끼는데, 이런 내가 너무 풍족하다고?"
저도 황당하다는 입장입니다. 환경 운동에 아주 만연한 저런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그런데도 환경 운동, 기후 운동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앞서 말한 두 가지 빈 칸의 원인을 설명해 주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의 원리만 놓고 보면 친환경 혁신으로 사회가 환골탈태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보면 자본주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문제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실관계가 부정확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경제냐 환경이냐 또는 생존이냐 기후냐 하는 식의 양자택일을 강요합니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기후에 관심을 갖는 것인데 말입니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단지 정부나 기업이 위로부터 무언가 변화를 가져다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참여로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 그 운동적 마인드는 매우 소중한 것이고 이를 살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틀린 생각은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전 세계가 한국인처럼 살려면 지구가 한 개로는 부족하다”는 말은 어디가 틀렸을까요? 전형적인 단순 평균의 함정입니다. 한국의 에너지 총소비량을 인구수로 나눈 다음에 그것에 세계인구를 곱하면 지구 하나로 부족하다는 것인데, 문제는 한국인의 평균 에너지소비량에는 한국이 세계 반도체 생산 1위, 자동차 생산 5위, 철강 생산 6위, 에틸렌 생산 6위, 군사력 6위라는 점이 뭉개져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인의 가정용 에너지 소비는 결코 다른 나라보다 크게 높지 않습니다. 다음 도표를 보시죠.

왼쪽의 도표는 단순 평균, 그러니까 산업과 가정용을 구분하지 않은 것이고, 오른쪽은 이를 산업과 가정으로 나눈 것입니다. 빨간색이 한국이고 짙은 파란색이 OECD 전체평균과 유럽평균입니다. 산업과 가정을 뭉뚱그려 놓으면 한국인 에너지 소비가 높지만 가정용만 떼어놓고 보면 유럽보다도 적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 1인당 소비가 높다는 것은 한국 기업들이 세계 경제에서 맡고 있는 분업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그런 만큼 “전 세계가 한국인처럼 살려면 지구가 한 개로는 부족하다”는 좋게 말해 착시이고, 나쁘게 말하면 한국과 세계 기업들의 책임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폐단, 즉 혁신은 왜 실패하고 위기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평범한 사람들의 탓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요? 바로 자본주의가 외견상 표방하는 것과 달리 평등하지 않고, 소수의 사람들이 생산을 결정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소비까지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오늘은 임시로 그런 사람들을 지배층, 나머지 사람들을 피지배층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윤석열, 바이든, 시진핑 같은 정치인들, 이재용, 빌 게이츠, 일론 머스크 같은 거대 기업인들이 그 지배층이고 제가 말씀드린 두 가지 폐단이 벌어진 것은 그런 사람들이 결정권을 휘둘렀기 때문입니다.
관련해서는 다음주 주제인 기후정의 파트에서 더 다룰 예정입니다. 일단 오늘은 원래의 빈칸 채우기로 돌아오죠.
세 번째 빈칸은 이것입니다: 자본주의는 (가칭)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뉜다.

그런데 온실가스 배출의 책임도 지배층에게 있고, 그로 인한 이익도 사실상 지배층에게 귀속됩니다.
이 세 가지 명제로부터 제가 드리는 답은 녹색자본주의로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기후 문제에서 인류가 모두 한 배를 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피지배층에 속하는 사람들과 지배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해관계가 다릅니다. 자본주의를 지속하는 채로는 경제 위기뿐 아니라 전쟁과 갈수록 격해지는 환경 위기 때문에 온실가스 감축은 더더욱 뒤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정상 작동”할 때에조차 지난 수십 년간 기후 대응에서 맹점을 보여 왔습니다.
기후 세미나에서 “안 된다”만 얘기하고 끝내서는 안 되겠죠. 가뜩이나 우울한데 더 우울해질 테니까요. 대안은 운동입니다. 그러나 관점을 분명히 하는 운동이죠.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기후위기 문제를 놓고 사회가 상하로 나뉘어있고, 자본주의 자체를 타도해야 한다는 인식이 갈수록 커졌고 급진화해 왔습니다.
2000년대에는 환경단체들과 명동에서 부채를 나눠주며 에어컨 틀지 말자고 하며 기후변화에 관심을 호소했었습니다. 그러다 2009년 코펜하겐에서 ‘기후변화가 아니라 체제 변화’라는 구호(왼쪽 하단)로 대표되는 급진적인 운동이 부상했습니다.


이런 운동들은 각국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방안 요구나 탄소 악당 기업 비판, 신공항 건설 등 환경 파괴 반대 등 '환경 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여성운동, 노동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요구를 기후 위기 해결과 결합시키는 형태도 많습니다.
몇 해 전 프랑스에서 정부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에너지 사용을 줄이라며 부과하려던 환경세에 반대했던 노란조끼운동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마치 정부의 담배세 인상이 실은 평범한 사람들의 폐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듯이 프랑스의 환경세도 온실가스 감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노란조끼운동은 평범한 사람들의 경제적 고통을 항의하는 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온실가스 감축에도 전혀 진지하지 않은 정부를 비판했고, 그러면서 프랑스의 아주 광범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또 고무했습니다.
관련 얘기는 다음주 ‘기후 정의가 무엇이고 왜 중요한가?’에서 더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그런 운동들로 자본주의 자체를 바꿀 잠재력이 있고, 여러분들도 그렇게 사회를 아래로부터 바꾸는 활동에 함께하시면 좋겠다고 당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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