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에서 4번에 걸친 세미나로 진행하는 '기후위기, 무엇이 문제이고 대안은 무엇인가?'에서 둘째로 발표한 자료를 다듬은 것입니다.이날 참석자들에게 사전에 배포한 읽을거리는 이 링크에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첫째 발표 자료는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둘째 시간, ‘기후정의, 무엇이고 왜 중요할까’입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원래는 지구환경을 지키려고 대기과학을 전공했었는데 과학보다 사회운동이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졸업 후 연구직이 아니라 활동가의 길을 택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제가 대학원에서 마지막으로 수행했던 연구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시작할까 합니다.
당시 연구는 황사발원지에 적합한 황사 방지 체계를 갖추기 위한 연구였습니다. 황사는 중국과 몽골에 걸쳐 있는 고비 사막의 모래 폭풍으로 생기고, 이것 자체는 기후변화 현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고비 사막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데 이것을 사막화라고 합니다.
고비 사막의 확장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첫째는 유목민들이 양과 염소를 너무 많이 기르다 보니, 그 양과 염소가 풀과 나무를 뜯어먹어서 사막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꽤 그럴듯하죠? 사실 제가 몽골에 가기 전까지 들은 설명은 이것뿐이었어요.
그런데 현지 조사 중에 울란바토르 대학에 들러서 여러 견해를 들었는데 축산학과에서는 양과 염소를 탓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보다는 사막에서 지하수를 너무 퍼 올리다 보니 사막을 가두는 구실을 했던 풀과 나무들이 물 부족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실제로 조사를 해 보니 몽골은 세계적인 광물 수출국이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몽골 노천 광산의 사진이고, 세계에서 가장 큰 구리광산 중 하나에 속한다고 합니다.
하단의 자동차들은 어마어마하게 큰 트럭인데 저렇게 작게 보일 만큼 광산이 엄청나게 큽니다. 저런 노천 광산은 그 자체로도 환경을 파괴하지만 무엇보다 물을 어마어마하게 소비합니다. 채굴 장비를 식히고 원석을 세척하는 등에 물이 많이 쓰입니다. 사막이니까 물이 부족하고, 그래서 지하수나 인근의 강물을 끌어온다고 합니다.
제가 우연히 접한, 고비 사막에 대한 이 두 가지 상반된 설명은 그 자체로 사회적 함의를 갖습니다. 양과 염소가 문제라는 주장은 몽골 사회에서 가난한 축에 속하는 유목민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지목합니다. 그 주장이 맞다면, 유목민들의 사정이 딱할지라도 그들을 단속하고 기후 위기의 이름으로 그들의 생계수단을 억압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광산이 문제라면 거기에 돈을 대는 몽골과 해외의 각종 큰손 투자자들을 규제해야겠죠.
이처럼 원인 진단이 다르면 대안도 달라집니다. 그런데 제가 앞서 몽골 현지에 가기 전까지는 첫째 설명, 즉 양과 염소를 탓하는 설명만 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몽골에서 유목민들은 이미 1990년대부터 강물 사용을 놓고 광산 기업과 충돌해 왔고, 정부는 테러 단속법까지 동원해 가혹하게 탄압하고 있었습니다. 광산이 몽골 경제의 핵심 외화벌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환경 문제에서는 이해관계가 충돌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깨끗한 물과 안정적인 기후는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인 만큼 ‘환경 문제에서는 너와 나의 이익이 다를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환경 문제에서는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 중에 어느 것을 더 중시할 것인가 하는 문제, 즉 가치판단 문제가 제기됩니다.
오늘 주제가 기후정의이죠? 얼핏 보면 객관성과 과학의 영역이라고 생각되는 '기후'라는 단어와, 가장 인문학스러운 단어인 '정의'라는 단어가 결합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위 몽골 사례에서는 생계를 위해 양과 염소를 치는 유목민과 광물 개발 기업이 물 사용을 놓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사실 가난한 유목민에게 더 나은 생계를 보장한다면 염소 과잉 방목을 줄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유목민의 염소가 사막화의 원인일 수 있다는 진단 자체가 과장이 아닐까 의심스럽긴 합니다.) 진짜로 어려운 일은 광산 개발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광산 개발을 중단하려면 아무리 작게 보더라도 광물 수출에 의존하는 몽골 경제를 바꾸고, 몽골 광산 개발로 이윤을 얻으려는 해외 큰손 투자자들과 충돌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서방과 중국 간 ‘신냉전’이 심각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몽골 광산 개발과 유목민 탄압에는 서방과 중국이 따로 없습니다. 저 사진 속의 몽골 광산을 개발하는 사업자는 리오틴토(Rio Tinto)라는 기업으로 본사가 영국 런던과 호주 멜버른에 있는 세계 2위 광물 회사입니다. 그리고 저렇게 채굴한 몽골의 광물은 다름아닌 중국으로 공급됩니다. 그래서 중국도 광산 유지에 아주 혈안입니다. 특히 최근의 신냉전으로 원거리 광물 수입이 위태로워지면서 이제는 고비사막 광산 개발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결국 이렇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고비 사막화 문제는 세계경제에서 몽골이 맡은 역할 때문에 악화돼 왔지만 그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고 있다. 생태 위기를 고려하면 광산 개발보다는 자원 재활용 비율을 높이는 것이 합리적이고 기술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죠. 한편, 유목민의 생계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지만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국 정부에 의해 기후악당과 테러리스트라는 비난과 처벌을 받고 있다.
바로 이런 현실이 부조리하다는 것입니다. 기후 정의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 윤리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진정한 해결책을 가로 막고 있는, 현실에서 감춰진 이해관계를 들춰낸다는 것입니다.
온실가스 감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들 아시는 것처럼 온실가스는 화석연료에서 나오는데 화석연료는 오늘날 세계경제의 근간이고, 그래서 화석연료와 온실가스를 줄이는 문제에서도 자연스럽게 이해관계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국내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랫동안 환경운동에서는 (오늘 제가 하듯이 이해관계를 따지기보다는) 투박하게 ‘인간 vs. 환경’이라는 구도로 접근하는 관점이 많았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그런 관점에 도전하면서 영향력이 컸던 사건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위 사진은 2019년에 석탄 화력발전소에서 산업재해로 숨진 김용균이라는 24세 청년의 생전 모습입니다. 김용균씨가 목숨을 잃은 태안화력발전소에서는 그 이전부터 사망 사고가 꾸준히 발생해 왔습니다. 또한 김용균씨는 비정규직, 정확히는 하청 노동자였습니다. 이 사진은 생전에 고인이 정부에게 정규직화 약속을 지키라고 촉구하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찍었던 것입니다.
김용균씨의 사망 사고가 온실가스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가 일하던 곳이 화력발전소였던 것이죠. 그러나 청년 김용균씨의 죽음으로 커다란 항의 운동이 벌어지면서 화력발전소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가 집중 조명 됐습니다. 그런데 김용균씨의 이런 억울한 죽음과 그가 요구한 정규직화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정부가 석탄 화력발전소 일부를 폐쇄하면서 다시 한번 그 노동자들이 고용과 처우에서 내팽개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 화력발전소 문제에서도 이해관계가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됐죠.
이전까지는 화력발전소 노동자들을 ‘온실가스 배출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면서 기후악당의 일부로 보는 관점이 적잖았던 것이 사실입니다.(저는 연구원 시절부터 그런 관점에 반대해 왔습니다.) 그러나 김용균씨의 죽음과 항의운동을 보면서 많이들 생각이 바뀌었어요. 온실가스로 지구 생태계를 희생시키는 이윤 논리가 그 작업장에서 종사하는 노동자에게도 해롭다는 생각, 즉 화력발전소 안에서도 이해관계가 나뉜다는 생각이 전보다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화력발전소에서 노동자와 사장은 당연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노동자는 생계를 벌기 위해 발전소에 다니지만, (발전소는 공기업인데) 사장에게 발전소란 그가 정치권이나 산업계, 관료 사회에서 명성과 지위를 누리는 수단입니다. 만약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발전소를 폐쇄한다면 둘 중 누구의 이익을 더 고려해야 할까요?
당연히 노동자들입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직장에서 온실가스를 많이 내뿜자고 결정한 바도 없고, 산업을 지탱한다는 책임감으로 열악한 조건에서 묵묵히 일했을 뿐입니다. 반면에 발전소 사장은 바로 온실가스 배출 결정을 내렸던 국가 기구의 일원이고, 그렇게 환경과 노동자를 희생시켜 그간 높은 권세를 누린 만큼 마땅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정의로운 전환이라고 부릅니다.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사회를 바꿀 때, 기존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더 나쁜 일자리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노동자들의 재고용이나 충분히 넉넉한 은퇴를 위해서는 당연히 비용이 필요한데, 그 비용을 기업과 정부가 부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업과 정부가 그간 경제 성장을 계획했고 그로 인한 이익을 누려왔기 때문입니다. 발전소를 가동하는 동안 이해관계가 달랐던 만큼, 발전소를 폐쇄할 때에는 마땅히 그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대우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때, 제가 일컫는 노동자에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자면) CEO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사장도 월급쟁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입니다. 노동자는 누군가 이미 갖춰 놓은 설비를 가동시키는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의 대가만 받은 사람이고, CEO 등은 애초에 그런 온실가스 배출 설비를 짓고 확장하는 결정을 내렸고 무엇보다 그 결과로 생기는 권력이나 이윤을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기후 위기 해결 과정에는 이해관계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만큼 그것을 잘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몽골 유목민 vs. 채굴 기업의 갈등도, 국내 석탄 발전소 안에 존재하는 노사 간의 갈등도 모두 그런 사례입니다. 한쪽에는 생계 유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로, 이들은 국가나 기업의 경제가 성장할 때 덩달아 소득이 늘기도 하지만 결코 경제 성장 속도 그 자체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다른 한쪽에는 광산 개발이든, 화력발전소든 그 가동이나 폐쇄를 결정하는 사람들, 즉 훨씬 더 강력한 결정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가 성장할 때 그에 준해서 소득과 지위가 높아지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해관계는 기후 위기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예컨대, 몽골 광산 개발에 앞서 몽골 정부와 광산기업 리오틴토 사이에 지분 싸움이 길게 진행됐습니다. 그러나 몽골 정부도, 리오틴토도 몽골 생태계를 지키려고 싸운 것도 아니고, 유목민을 대변하려고 싸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둘 다 생태계를 파괴하고 유목민을 내쫓아서 이윤을 얻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 지분을 놓고 싸웠던 것이죠. 기후정의의 관점으로 보면 이런 이해관계 충돌보다 유목민과 나머지 사이의 이해관계 충돌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죠.
이 대목에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을 한 번 복습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3개의 빈 칸을 채웠는데, 셋째 빈칸이 바로 (가칭)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장 이 모두에 동의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나하나 많은 설득과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저 역시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러나 오늘 나온 사례로 재차 설명해 보자면,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피지배층이고, 광산 개발과 발전소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바로 지배층입니다.
온실가스 감축 관련 모든 쟁점, 정말이지 모든 쟁점에서 우리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이해관계 충돌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단지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런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문제를 바라 봐야 합니다.
사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온실가스를 펑펑 배출하는 지금의 사회는 결코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과학의 역사, 그러니까 과학사(科學史)를 보면, 화석연료를 경제의 중심에 놓으려고 엄청나고 또 인위적인 노력이 있었는데, 산업화를 이끈 서양의 지배층이 바로 그런 결정을 처음 내렸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 인도 등 후발국가들의 지배층도 서양의 발전을 모방하려고 똑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각국의 지배층이 화석연료를 채택하는 동기는 더 안정적으로 이윤을 얻어 자신들의 권력과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지난주 상호 토론 시간에 어떤 분이 ‘무엇과 누구를 위한 성장인지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백 번 동의합니다.
오늘날의 경제 성장은 이윤을 위한 성장인데, 왜냐하면 이윤이 지배층의 권력과 지위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의 모든 혁신으로도 기후 위기 대응에 실패하는 이유가 혁신이 중립적이지 않고 이윤 추구 쪽으로 치우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배층은 이윤 중심의 생산과 경제가 사라지면 권력과 지위를 잃습니다. 물론 그들도 이 지구에서 살아야 하니까 대부분은 기후 위기가 현실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친환경적 정책을 일부 추진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이윤과 권력이 흔들릴 것 같으면 금세 생각을 바꿉니다. 바로 이 때문에 둘째 빈칸에 있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기후 위기 대응이 번번이 뒤로 밀렸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현재의 사회 체제를 바꾸기에는 잃을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지배층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온실가스 배출을 결정할 만한 힘을 갖지 못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동기인 이윤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피지배층입니다. 이들이 설령 석탄 발전소나 가솔린 자동차 회사에 다니면서 생계를 꾸린다 하더라도 이들이 받는 돈은 임금이지, 이윤이 아닙니다. 임금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돈을 모아서는 해외에 발전소를 짓거나 자원을 개발하기는커녕 내 집 하나 마련하기도 빠듯하거나 대부분은 힘듭니다.
이처럼 오늘날 사회는 이윤을 버는 자와 벌지 못하는 자로 크게 나뉘고, 이윤을 소유하거나 그 사용처를 결정하는 이들이 지배계급, 그 반대편에는 지배계급이 이윤을 가질 수 있도록 노동력은 제공하지만 정작 그 쓰임에 대해서는 발언권이 없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을 피지배계급이라고 부릅니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라는 용어가 단순히 권력 유무를 표현한다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라는 용어는 정치경제학적으로 그런 권력이 이윤에서 나온다는 점을 더 드러내는 개념입니다. 이처럼 이윤을 중심으로 사회를 분석하면 현실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이해관계를 보다 정교하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후정의란 지배계급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관점에서 기후 위기 해결을 추구하는 것, 이윤보다 인간을 우선해서 기후 위기를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기후정의라는 개념을 계급이라는 개념과 결합시키는 목적은 무엇보다 실천을 위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기후 위기 해결에 필요한 힘을 모아내기 위해서입니다.
기후 문제에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 이해관계가 충돌한다면, 이렇게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다른 문제에서도 계급 간 이해관계 충돌이 있지 않을까?" 라고 말입니다. 당연히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에서 계급 간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바로 그 점에 집중해야 기후 위기 운동의 잠재적 아군을 엄청나게 늘릴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봤던 그래프를 하나 다시 볼까요?
이 그래프는 저도 볼 때마다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 들어요. 석유파동이나 소련 붕괴, 2008년 금융 위기나 코로나 같은 세계사적 사건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감축을 요구하고 있으니까요.
지난 시간에 저는 운동으로 사회를 통째로, 자본주의 전체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대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엄청나게 강력한 운동이 필요합니다. 온실가스와 기후 위기 문제를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운동이 쨘~ 하고 생겨서 “사회를 바꾸자!” 하고 싸운다면 물론 멋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지고 있는 운동들에서 공통의 이해관계를 찾아내서 연대하고, 결합하려는 시도가 훨씬 더 현실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2018년 프랑스 노란조끼운동은 아주 인상적인 사례입니다. 이 운동은 프랑스 마크롱 정부가 환경세를 부과하려는 것에 반대해서 벌어졌습니다.
“2018년 11월 17일 28만 명이 유류세 인상에 반대해 도로를 봉쇄하면서 노란 조끼 운동이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노란 조끼 운동은 사회를 뒤흔든 정치적 지진이었고,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산산조각 냈다.” 이것은 당시 소식을 전한 국내의 한 신문 기사입니다.
유류세 인상을 철회하라는 요구만 놓고 보면 별로 친환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크롱 정부가 환경세를 부과하려던 진정한 의도는 온실가스 감축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지부진한 프랑스 경제에서 기업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의 세금을 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윤을 위해 피지배계급에게 비용을 떠넘기려는 계급 쟁점이었습니다.
계급 쟁점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봤던 많은 활동가들의 기여로 노란 조끼 운동은 단지 환경세 반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 위기의 진정한 해결책도 함께 요구하고, 부익부 빈익빈이 갈수록 심해져서 생긴 불만을 모아내는 구실을 했고 그 덕분에 28만 명이라는 거대한 대중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또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기후를 위한 급진적 사회 변화를 토론하고 서로 생각을 나눴습니다.
오늘 주제인 기후정의는 그 특성상 논쟁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나눠드린 사전 자료에 나오는 3가지 쟁점들(개도국의 경제 발전, 대규모 재생에너지 국제 공유, 난민 문제)도 마찬가지이고, 이에 대해서는 상호 토론 시간에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견과 논쟁을 나누는 것은 어느 한 쪽이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고 생각을 훈련시키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린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나눠서 보는 관점을 적용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끝내기 전에 국내 사례를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근 한전 적자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입니다. 동시에 올 여름은 엘니뇨 탓에 폭염이 역대급일 것이라는 전망이 많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미 역대급 폭염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센 놈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은 워낙 작은데다 지리적 위치 때문에도 예측하기 좀 어려운 면이 있는데 적어도 동남아에서는 이미 모든 폭염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에너지 요금 인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장 내일(5월 16일)부터 4인가족 기준 월 평균 7000~8000원 정도 인상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대급 폭염이 예상된다면 오히려 기후위기 대처를 위해 전기요금을 내리는 것이 저는 맞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위기에 필요한 마스크를 정부가 싸게 공급했듯이(그것도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폭염에는 전기요금을 내려야 합니다. 요금 폭탄이 무서워서 에어컨을 제대로 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동시에, 늘어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하려면 필수적이지 않은 에너지 사용 예컨대, 대형 마트들은 한여름에도 잠바 없이는 돌아다니기 으슬으슬 할 정도로 냉장고 문을 죄다 열어놓고 장사하는 관행이 있는데 이를 단속하고, 장시간 노동을 줄이고 노동자들에게 유급휴가를 줘 공장과 사무실 가동을 줄여야 합니다.
그런데 전기요금을 인상하겠다는 것은 정확히 그 반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폭염 속에서 아이들이나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가구, 또는 저처럼 그냥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은 고스란히 요금 폭탄을 맞거나 꾹꾹 참으면서 버텨야 합니다. 반대로 인상된 요금만 낼 수 있다면 전기 사용의 목적 따위는 묻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업들은 전기요금이 인상되더라도 이윤을 얻을 수만 있다면 사업 관행을 기존대로 강행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에 평범한 사람들은 소득이 늘지 않는 이상 그러기 쉽지 않죠.
결국 전기요금 인상은 제한된 에너지를 놓고 기업들의 이윤 추구를 위해 평범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문제, 즉 계급 문제입니다. 기후 정의 운동은 요금 인상에 반대해야 합니다. 일각에서 ‘우리 모두, 지구를 위해 요금인상을 감수하자’고 말하는 것은 기후운동을 사회의 더 광범한 사람들과 여타 사회운동과 분리시키는, 아주 잘못된 입장입니다.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시대에 생계비 위기는 갈수록 많은 나라에서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연금 개악 반대 운동이나 영국 등지에서의 에너지 요금 항의 운동, 역사적으로는 2011년 중동을 휩쓴 ‘아랍의 봄’도 생계비 위기가 직접적 도화선이 됐습니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기름값 인상에 항의해서 크게 파업을 했죠. 최근 정부와 충돌하고 있는 건설노동자들은 폭염에 가장 취약한 집단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문제는 생계비 문제이고, 계급 쟁점입니다.
우리가 기후 위기를 막고자 한다면 그런 계급 쟁점에 뛰어들어 그 안에서 사회를 바꿀 잠재력을 발견하고 온실가스와 기후 위기 대책 요구를 결합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정의롭고 또 유일하게 현실적으로 기후 위기를 막을 대안입니다.
상호 토론 시간에 나왔던 질문 중 두 개를 소개하겠습니다.
Q1. 자본주의는 왜 화석연료를 사용하려고 인위적 노력을 기울였다고 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효율성이 더 높아서였나요?
A1. 흔한 생각과 달리 초기 화석연료(석탄 증기기관) 효율성은 수력(물레)보다 결코 더 높지 않았습니다. 화석연료를 택한 것은 기술적 장점이 경영 상의 필요 때문이었습니다.짧게 말해, 수력은 강수량에 따라 변동이 컸기 때문에 비가 적게 내리면 노동자들이 출근해도 충분히 일을 시킬 수 없었습니다. 반면 증기기관은 석탄 공급만 일정하면 변동폭이 적었고, 그 때문에 공장주 입장에서는 더 효율적이었습니다. 또한 수력을 이용하려면 공장 입지 조건이 까다롭고 무엇보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을 보다 까다로운 조건으로 고용해야 했습니다. 반면, 화석연료를 사용하면 실업자들이 모여있는 도시 한 가운데에도 공장을 지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더 낮은 임금으로도 부릴 수 있었습니다.더 자세하게 알고 싶으신 분들께는 아래 영상을 추천합니다.
Q2. 지배계급-피지배계급 관계가 국제적으로도 성립하는 것 아닐까요? 그동안 선진국들이 온실가스를 더 많이 배출해 왔으면서 지금 개발도상국들에게 온실가스 감축을 강요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A2. 선진국에게 온실가스 배출의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지적은 아주 중요합니다. 누적 배출량을 보면 여전히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이 중국, 인도 등 개발도상국보다 더 많이 배출했습니다. 단지 국가별 배출량뿐 아니라 오늘날 화석연료 중심의 기술과 인프라가 갖춰진 것부터가 선진국 탓이죠.
따라서 선진국이 개도국을 지원하고 선도적으로 온실가스를 줄여야 한다는 요구는 기후정의를 위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는 개발도상국 안에서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나뉜다는 것을 함께 봐야 합니다.
제가 사전자료에서 1번으로 제기한 문제도 바로 그것이었는데, 얘기가 나온 김에 사전자료를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위 지도에 따르면 아프리카와 중국, 인도는 피해 인구가 가장 많을 것으로 꼽힙니다. 그런 만큼 그 나라 정부와 기업들이 '우린 아직 경제 발전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온실가스 배출을 많이 하면 고스란히 자국민들의 피해로 돌아갈 것입니다.
만약 정말로 자국민을 위하는 정부라면 경제 개발뿐 아니라 온실가스 감축 필요도 함께 고민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프리카든, 중국이나 인도든 겉으로는 자국민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이윤을 쌓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윤이 많아야 세계 무대에서 다른 국가 지배자들과 경쟁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 점에서 미국, 유럽 지배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개발도상국 안에서도 이해관계가 갈리는 것입니다.
발제 때 말씀드린 몽골 사례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몽골 정부가 테러방지법까지 휘두르면서 유목민들을 탄압하는 것이 광물 수출을 위한 것이라고, 즉 서방 광물기업 및 중국 정부와 이해관계를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부는 지배계급에 속하고 유목민들을 피지배계급에 속하고,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진국에게 온실가스 배출을 선제적으로 줄일 책임을 요구할 뿐 아니라, 개발도상국 안에서도 계급이 나뉘어 있고 따라서 피지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 기후정의 관점을 일관되게 적용하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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