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에서 4번에 걸친 세미나로 진행하는 '기후위기, 무엇이 문제이고 대안은 무엇인가?'에서 셋째로 발표한 자료를 다듬은 것입니다. 이날 참석자들에게 사전에 배포한 읽을거리는 이 링크에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첫째 발표 자료(클릭)와 둘째 발표 자료(클릭)는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로 셋째 시간이네요. 제가 이학 박사이지만 지금은 과학연구보다는 사회운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주제 ‘기후 위기 막으려면 핵 발전 용인해야 할까?’는 제게도 참 각별합니다.
저는 비교적 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꿈이었어요. 기후변화는커녕 물리가 뭐고 화학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부터 꿈이었습니다. 그런 꼬마 시절에도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과학자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게 아인슈타인이 마냥 동경의 대상만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과학자란 생각보다 초라한 존재이구나…’라는 생각을 심어 준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39년에 미국 대통령 로즈벨트에게 핵폭탄 개발 착수를 촉구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이후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하자 아인슈타인은 그 편지를 쓴 것을 평생 후회했고, 남은 생애 반핵 운동을 벌였습니다.
물론 오늘의 주제는 핵폭탄이 아니라 핵발전소입니다. 그러나 핵발전소는 평화적으로 위장한 핵무기라고 봐야 합니다.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치른 후 사회적으로 무기 개발은 인기가 없었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각국 지배자들은 핵무기 개발을 계속하려고 핵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다시 말해, 핵발전 기술을 활용해서 폭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살상 기술을 버리지 않으려고 생각해 낸 핑계가 바로 핵발전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그것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 연구기관이 어딘지 아십니까? (카이스트가 아니라) 바로 원자력연구소이고, 1959년 이승만 정권 하에서 세워졌습니다. 당시 그 설립을 뒷받침한 원자력법은 이렇게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국민생활의 향상과 인류사회의 복지에 기여”한다. (원자력법 제1조, 1958년 3월 11일 제정)
1인당 국민소득 81달러의 농업 국가였던 대한민국에서 보릿고개 해결하려고 원자력연구소를 세웠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바로 냉전의 최전선이라서 핵무기를 꿈꾸며 만든 것이고 “국민생활 향상”은 핑계거리였을 뿐입니다.
1. 핵발전에 대한 환상
핵발전의 역사는 그 정도로 하고,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는 다음 질문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고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면, 과거사는 잊고 활용해야 하는 것 아닐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절입니다.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고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면”.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핵발전소는 원자로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라늄을 채굴, 운반해야 하고 또한 동위원소를 분리시키고 농축해야 합니다. 이 모든 단계에서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것도 막대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핵발전소 가동을 위해 따로 발전소를 짓기도 합니다.
핵발전 옹호가 존재의 이유인 국제원자력기구 IAEA조차 핵발전이 온실가스를 배출한다고 인정합니다. 유엔 산하 과학자 조직인 IPCC의 제3실무그룹이 2014년에 발표한 보고서(AR5)를 근거로 하면(66 gCO2eq/kWh) 태양광보다 2배, 풍력보다는 9배 이상 배출합니다. 즉, 핵발전은 석탄이나 가스 발전보다는 배출이 적지만 재생가능에너지보다는 배출이 많다고 봐야 합니다.
지난해 나온 IPCC 6차 보고서에서는 핵발전의 온실가스 배출량에 대한 정량적 언급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IPCC는 정치인들의 압력에 더 많이 휘둘린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결과일까요?) 그럼에도 핵발전으로 감축할 수 있는 온실가스가 재생가능에너지보다 훨씬 적다는 것만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아래 그림은 발전소 종류별로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는 양과 그 비용을 나타낸 것입니다. 가로축의 길이는 잠재적인 온실가스 감축량이고, 색깔은 비용(빨간색이 진할수록 비용이 큼)인데, 최상단의 재생가능에너지의 경우 이하 다른 발전 방식보다 가로 길이가 압도적으로 긴데, 온실가스 감축 잠재력이 그만큼 재생가능에너지에서 압도적으로 크다는 뜻입니다. 반면 핵발전은 길이도 짧을 뿐 아니라 색깔도 금세 새빨개지는데 겨우 저만큼 줄이는데도 비용은 그렇게 크다는 것입니다.
핵발전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하자는 생각이 부적절한 또 다른 이유는 방사능 폐기물 때문입니다. 최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오염수 방류를 놓고 시끌시끌하지 않습니까? 저도 지난 주말에 그 집회에 가서 목소리를 보탰습니다. 그런데 방사능 폐기물은 사고가 벌어지지 않아도 나옵니다. 즉, 정상적인 핵발전소에서도 폐기물이 나옵니다.
방사능 폐기물은 10만 년, 플루토늄의 경우에는 20만 년 이상을 자연계와 완전히 단절시킨 상태로 보관해야 합니다. 10만 년이 얼마나 긴 지 가늠해 봅시다. 지난 번 빙하기가 약 2만 년 전, 인류사에서 농업이 등장한 신석기 혁명이 1만 년 전입니다. IPCC는 기껏해야 2100년까지 수십 년 규모의 기후만 예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수치를 한참 뛰어넘는 방사능 폐기물을 양산하는 것이 과연 해결책일까요?
만약 우리 사회가 지금 같지 않고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것을 최고 우선순위에 두도록 바뀐다면, 약 10~20년에 걸쳐 배출량을 지속가능한 수준으로 감축할 수 있을 것이고 100년, 200년 후에는 기후를 안정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온실가스 배출량을 자연의 탄소 흡수량 이하로 줄이면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가 서서히 내려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후위기는 물론 심각한 사태이지만 사회가 바뀌면 일이백 년 안에 해결할 수 있는 재난인데 이를 택하는 대신에 10만 년, 20만 년짜리 쓰레기를 만드는 것은 합리적 선택이 아닙니다.
핵발전이 기후 위기 시대에 부적절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바로 쉽게 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핵발전은 기본적으로 밀집된 핵연료 사이에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라서 신속하게 끄기 어렵고, 그래서 갑작스런 재난에 대응하기에 부적절합니다. 핵발전 옹호론자들은 핵발전소의 출력이 일정한 것을 대단한 장점인양 말하지만, 필요한 상황에서도 끌 수 없다는 것은 결코 장점이 아닙니다.
지난해 동해안에 역대급 산불이 났을 때, 산불이 핵발전소 인근까지 번졌다는 간담이 서늘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태양이나 풍력 발전이라면 얼른 발전을 중단하고 대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핵발전은 그리 간단하게 끌 수 없습니다. 지금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문제가 되는 것도 사고가 난 지 12년이 지났지만 계속해서 에너지가 방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사능 연쇄반응을 멈춘다는 것은 그렇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원자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산불과 가뭄, 홍수, 해수면 상승이 모두 기후변화로 예기치 못하게 찾아올 것입니다. 기후변화 적응이라는 관점에서도 핵발전은 꽝인 것입니다.
2. 재생가능에너지만으로는 안 된다?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이런 질문이 곧바로 이어지곤 합니다:
그렇지만 재생가능에너지로 에너지 전환을 온전히 이룰 수 있나요? 그게 안 되니까 핵발전 하자는 것이잖아요.
재생가능에너지만으로는 안 된다고 앞장서서 말하는 이들은, 실제로는 생태위기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친환경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얘기는 좀 있다 하겠습니다.
그 전에 재생가능에너지만으로 인류의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해결해야겠죠.
우선, 에너지 총량은 당연히 부족하지 않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의 모든 에너지는 근본에서 태양에서 오고, 현재의 재생가능에너지 기술로는 태양에너지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전기로 전환시킬 수 있을 따름이지만 그조차도 현재 에너지 수요를 몇 십 배나 상회합니다.
관건은 에너지의 간헐성입니다. 쉽게 말해 태양에너지가 밤에는 없고, 바람도 일정하게 불지 않는다는 것이죠. '간헐적이다'는 말은 꾸준하지 못하다,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간헐성 문제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입니다. 에너지 소비를 에너지가 많이 생기는 시간대로 대거 옮기고, 지역간 합의를 통해 에너지를 장거리 수송하면 해결됩니다.
구체적으로 보죠. 아래 그림은 예일대학교 환경대학원 블로그에서 퍼온 것입니다. 상단은 수요를 조절하지 않았을 경우, 하단은 태양 발전에 맞춰 수요를 조절한 경우입니다. 가로축은 0시부터 24시까지 하루 일과 시간이고, 세로축은 에너지 소비량입니다. 노란 실선은 태양 발전 공급량이라서 한낮에 올라갔다 밤에 떨어집니다. 관건은 저 노란 선 안으로 최대한 많은 에너지 소비량을 맞추는 것입니다. 각종 색깔 면은 드라이기 사용, 온수기, 냉방기, 전기차 충전 등입니다.
이 그림의 메시지는 사회를 바꾸면 전력 수요의 상당 부분을 태양 발전 가동 시간 동안 충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단에서는 노란 반원 바깥에 있는 것들을 하단에서는 그 안으로 모은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집의 단열이 잘 된다면 낮 시간에 냉방기를 집중적으로 가동해서 야간 이용을 최소화하고, 전기차도 낮 시간에 충전하면 됩니다. 야간에 쓸 수밖에 없는 샤워와 보조적 냉난방을 위한 전력 정도는 배터리로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관련 내용을 별도로 다룬 저의 지난해 블로그 포스트)
이 그림에서 말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핵심적으로 산업 수요가 빠져 있죠. ‘과연 밤에 꼭 공장을 돌려야 하느냐?’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물론 병원이나 편의점, 피로를 달래기 위한 술집, 클럽 등 일부 시설은 밤에도 꼭 필요하고 거기에 쓰이는 전력은 역시 배터리로 충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장을 꼭 밤에도 돌려야 하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노동자와 그 노동자의 부모, 자녀의 입장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야간 노동은 건강에도 안 좋다고 익히 알려져 있죠.
문제는 기업들입니다. 기업들은 자신이 투자한 설비가 잠시라도 쉬는 것을 바라지 않고 가능하면 공장을 24시간 가동하길 바랍니다. 지난주 상호토론 시간에도 관련 질문이 나와서 답변드렸지만, 산업혁명 시기에 화석연료가 수력 방직기를 밀어낸 핵심 이유도 에너지 효율이 높아서가 아니라 이것, 바로 공장주들이 기계와 노동자들을 최대한 시간 효율적으로 부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위 그림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자세히 보시면 황토색, 즉 빨래건조기 사용 시간이 밤 10시에서 오후 5시로 당겨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게 의미하는 바는 퇴근 시간을 앞당기거나 세탁을 개별 가정이 아니라 공동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에너지 간헐성 문제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입니다.
그러나 에너지 간헐성의 해법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인류는 이미 초고압 직류 송전시스템(HVDC)이라는 장거리 송전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이때 장거리란 경상남도에서 서울로 전기를 보내는 수준이 아니라 대륙을 가로지르는 규모, 수천~수만 킬로미터까지 전력을 공급하는 것으로 슈퍼그리드, 또는 메가그리드라고 부릅니다.
기술이 있는데도 그것이 실현이 안 되는 이유는 역시나 사회적 문제입니다. 우측 하단에 썸네일을 표시한 유튜브 영상은, 사하라 사막의 태양에너지를 지중해 건너편 유럽에 공급하려던 계획이 왜 실패했는지를 설명한 것입니다.(제가 지난번 시간에 앞서 나눠드린 사전 자료에서 소개했었죠.)
문제는 과학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①유럽 태양광 발전 단가가 내려가서 투자자들이 유럽 바깥에 투자를 꺼리게 됐다는 것('시장 경쟁 탓에 태양광이 태양열 발전을 잡아먹은 셈'), ②프로젝트 추진 중에 아랍 혁명으로 기존 정치 질서가 흔들리면서 투자 보호가 위태로워졌다는 것, ③태양열 발전시설 냉각에 필요한 물 소비 문제로 현지 농민들이 강하게 항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윤이 아니라 생태적 필요를 우선하고, 유럽인뿐 아니라 북아프리카 현지 주민들의 필요까지 고려했더라면 실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재생가능에너지 간헐성 문제는 사회가 바뀌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재생가능에너지가 불가능하니까 핵발전을 하자는 주장에는 ‘사회를 바꾸느니, 차라리 방사능 폐기물을 쌓자’는 프레임이 깔려 있고 거기에 갇히면 안 됩니다.
3. 핵발전 논란과 이해관계 충돌
핵발전은 논쟁이 아주 많은 주제인 만큼 제 발제 후 상호토론 시간에 많은 의견과 제 발표에 대한 이견도 적극적으로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문제는 우리 모두의 미래가 걸린 문제인 만큼 청년들의 생각이 매우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상호 토론을 염두에 두고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지난 문재인 정부의 탈핵은 전혀 탈핵이 아니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집권기에 추가적으로 폐쇄된 핵발전소는 단 한 기도 없습니다. 이게 팩트입니다.
박근혜 정부 때부터 폐로가 예정됐던 고리 1호기(사실 이것도 노무현 정부 때 연장가동이 결정돼 이미 설계수명을 한참 넘긴 것이었습니다)가 문을 닫았을 뿐, 가동 중인 나머지 핵발전소는 모두 유지됐고, 신규 건설 중인 핵발전소 5개도 모두 그대로 진행시켰고, 심지어 아직 공사를 시작도 안 한 신한울 3,4호기도 취소시키지 않아서 결국 최근 다시 재개됐습니다.
그래서 많은 진보적 단체들이 문재인 정부가 “탈핵을 (무려) 60년이나 미뤘다”, “탈원전은 없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정권 마지막 해 신년사에서는 청와대 자신이 “우리는 탈핵 정부가 아니다”라고도 밝혔습니다.
그러면 언론에서 우리가 툭하면 듣는 얘기, 특히 <조선일보>가 아주 앞장서서 하는 얘기, 즉 ‘문재인 정부의 탈핵 탓에 전기가 부족하고, 전기요금이 오르고, 경제가 다 망하게 생겼다는 얘기는 뭐란 말인가?’ 하고 물으실 것입니다. 놀랍게도 모두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주류 담론에 반하는 주장을 여럿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복습해 볼까요?
- 핵발전은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다? → IPCC는 물론이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조차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핵발전은 화석연료보다는 적지만 재생가능에너지보다는 많이 배출한다.
- 재생가능에너지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핵발전은 불가피하다? → 사회를 바꾸면 얼마든지 재생가능에너지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배제한 주장이다.
- 문재인 정부는 탈핵 정부였다? → 단 한 기의 핵발전소도 취소되지 않았다. 전임 박근혜 정부 때 폐로가 결정됐던 (1967년에 지어진 국내 최초 핵발전소인) 고리 1호기가 문닫았을 뿐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실관계와 다를 수 있을까요? 핵발전과 방사능 문제를 놓고서는 이해관계가 격렬하게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여러분께 기후 위기는 사회의 근본인 에너지와 연결된 탓에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후가 안정화되는 것이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니까 기후 위기 앞에 너의 이익과 나의 이익이 다를 수 없다’는 생각은 틀렸다고 말이죠. 핵발전과 방사능 문제는 대표적인 경우이고 그래서 이처럼 주류 담론마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방사능 피폭의 위험성도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이 크게 갈리는 문제입니다. 일본 핵발전소 오염수 방류 문제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쟁점이 되고 있고, 특히 옥스퍼드 명예교수라는 자가 자기는 방사능 오염수를 1리터라도 바로 마실 수 있다고 말해서 논란이 됐습니다. 그 사람뿐 아니라 국내외 핵발전 산업계는 방사능 위험성이 과장돼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주장은 “과학에서 100퍼센트 확실한 것은 없다”는 점을 악의적으로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들은 '직접적 증거'가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당연하지만 방사능 인체 실험은 금지돼 있습니다. 더욱이 방사능 피폭은 주되게 백혈병, 암(癌, cancer)이나 자가면역질환 형태로 나타나는데 문제는 현대 의학이 아직 사람의 면역체계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이나 백혈병은 발병 원인을 특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코로나처럼 바이러스 때문에 생기는 병에는 추적조사를 통해 감염경로를 지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암이나 면역 관련 질환은 사정이 다르고, 방사능이 위험하지 않다는 주장은 이 점을 악의적으로 파고듭니다.
담배회사가 ‘담배가 폐암을 유발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수십 년 동안 로비할 수 있었던 것도, 삼성전자가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백혈병 문제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오랫동안 버텼던 것과 비슷한 추태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알지 못한다”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방사능이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으니 최대한 자제하자”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고, “방사능이 위험하다는 증거가 없으니 최대한 활용하자”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이해관계 차이를 반영합니다. 핵발전소 인근 주민과 노동자 등 평범한 사람들의 안전을 우선할지, 핵산업계와 핵무기 기술을 원하는 권력자들의 이해관계를 우선할지에 따라 선택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명백히 후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증거가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제가 이번에 나눠드린 사전 자료 2페이지 오른쪽에 실린 그림은 그런 점에서 중요합니다. 그 그림은 지금껏 인류가 실시한 유일한 방사능 인체 실험, 즉 일본 원폭 투하 피해 생존자들을 조사해서 얻은 결과입니다. 그 그림에서 중요한 문구는 “문턱 없는 선형비례모델”이라는 것입니다.
‘문턱이 없다’는 말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드사나 통신사가 대금 청구할 때 10원 미만은 청구하지 않는 것을 원단위절사라고 하잖아요? 이 경우 10원이 문턱이고 1원에서 9원까지는 없는 셈 쳐도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방사능 피폭에 “문턱이 없다”는 것은 아무리 작은 방사능 피복이라도 그에 비례해서 암 발생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방사능을 적게 쬐면 안전하다는 주장은 과학적 주장이 아닌 것입니다.
더욱이 저 그림은 핵산업계 종사자들이 집필한 자료집에서 긁어온 것입니다. 그들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과학적 권위의 연구라는 것을 여러분께 보여 주려고 일부러 거기서 가져 왔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핵산업계는 ‘통계적으로 보면 미미하다’는 주장을 내세워 저 연구를 사실상 부정하려고 온갖 말들을 만들어냅니다. 통계가 불충분한 것은 인체 실험이 불가능하고 면역체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지, 안전하다고 입증하는 게 아닌데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기후정의 문제를 다루면서 국제 기구를 통한 실천이나 선진국의 후진국 원조 같은 국제 협력을 강제할 방법이 없을까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요즘 정세에 중요한 질문인데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각국이 에너지 안보라는 미명하에 핵발전과 화력발전에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재생가능에너지와 온실가스 감축은 에너지 안보를 내려놓고 지금껏 본 적 없는 국제적 협력을 요구합니다.
유엔이든 어제 일본에서 모인 G7이든 기존 국제기구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기본적으로 그런 국제기구는 각국 지배계급의 대표들이 모이는 기구인데 이들은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사회변화로 잃은 것이 가장 많은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대안은 아래로부터 사회 변화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약 200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기도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크게 둘로 나뉘어 있기도 합니다.(더 자세한 얘기는 지난 시간 발표문들(#1, #2)을 봐 주세요.)
피지배계급은 국익으로 분열된 상태로 얻는 이득이 없습니다. 이 얘기는 마르크스도 했지만("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 존 레논의 Imagine의 가사에도 나오는 얘기(Imagine there's no countries / It isn't hard to do)입니다. 관건은 현실적으로 국경을 넘는 피지배계급의 단결이 가능하냐는 것이죠.
자본주의 이전 시대와 달리 자본주의에서는 각국의 이질성은 최소화되는 반면, 계급 간 차이점은 더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늘날 아무리 나라 간 격차가 크다고 해도 자본주의 이전과 비교하면 정말 작은 편입니다. 14세기 한반도에 존재하던 고려와 남미의 잉카 제국, 그런 잉카 제국을 정복하려던 유럽 스페인 간의 차이와 오늘날 한국, 라민아메리카, 스페인의 차이를 대조해 보십시오.
그처럼 나라간 이질성이 작아진 결과, 어느 한 나라에서 혁명 같은 대규모 격변이 일어나면 인근 나라로 빠르게 전파될 수 있습니다. 가깝게는 2011년 아랍 혁명이 그런 경우입니다. 당시 튀니지에서 한 노점상 청년의 분신으로 촉발된 정치 혁명이 이집트를 거쳐 북아프리카와 중동으로 번졌고, 미국에서 ‘점거하라’ 운동을, 남유럽에서 긴축 반대 투쟁을 촉발했습니다.
우리가 더 주목할 만한 역사적 경험은 제1차세계대전입니다.
2차대전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다룬 영화, 즉 히틀러의 패망을 그린 영화는 많아도 1차대전 종전을 다룬 영화는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1차대전은 협상국과 동맹국이라는 양 진영에서 잇따라 혁명이 잇따라 벌어지면서 끝났기 때문입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먼저 벌어졌고 이듬해에 1918년 독일혁명이 벌어졌습니다.(만약 영화를 찍는다면 전쟁 영화가 아니라 정치 영화가 될 것입니다.)
전쟁이라 하면, 국익과 ‘민족 공동체’를 가장 우선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래로부터 반란이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강력하다면 전쟁 와중에 총구를 겨눴던 반대쪽 진영에서도 공감대와 비슷한 혁명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1차대전 종전의 메시지입니다. 기후 위기 대응에 필요한 국제 협력은 오직 그런 아래로부터 변화로 피지배계급보다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우선될 때 그런 국제적 연대로 가능하고 그런 방법으로만 기후 재앙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날 상호토론 중 노트북 배터리가 떨어져서 온라인 참석자 분들이 끄트머리 내용을 못 듣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제가 했던 말을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아래에 적었습니다. 또한 상호토론 시간에 나온 질문 중 하나를 제가 그만 답변하지 않은 게 있어서 그 답변도 함께 썼습니다.
Q. 지난 시간에 정의로운 전환을 말씀하셨는데, 핵발전소 노동자들에게도 적용해야 할까요?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는 핵발전을 지속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요?
A. 핵발전소 노동자들에게도 '정의로운 전환'을 적용해야 마땅합니다.('정의로운 전환'이란 기후위기 대응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실업이나 더 나쁜 조건의 일자리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핵발전 가동을 결정한 권력자들과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는 같지 않습니다. 권력자들은 핵무기 기술과 핵산업계 이윤으로 더 많은 지위와 권력을 탐합니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생계수단이라서 (방사능 피폭 위험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일하는 것입니다. 핵발전소 사고라도 벌어지면 노동자들은 위험해지는 반면, 경영진이나 권력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드 <체르노빌>은 여러 점에서 탁월하지만 핵발전소 종사자와 권력자 사이에 이해관계가 얼마나 판이한지를 잘 묘사한다는 점에서도 훌륭합니다.)
핵발전소를 폐쇄하면서 노동자들에게는 그간의 피폭량을 고려해 신체에 부담이 적으면서도 월급, 노동시간 등이 나빠지지 않는 다른 일자리나 풍요로운 은퇴를 보장하는 것이 '정의로운 전환'입니다.
또한 핵발전소는 다른 발전소와 달리 가동 중지와 해체, 봉인 과정에 10년가량 소요됩니다. 다시 말해, '핵발전 가동 중지' 결정 후에도 방사능과 방사선에 관한 전문지식을 갖춘 일부 노동자들이 해야 할 일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핵발전소 노동자 문제는 중요한 쟁점입니다. 한국의 한수원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핵발전소 노동조합은 핵발전에 찬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노동자들은 핵발전소가 문을 닫으면 자신들의 생계를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후 운동이 그 노동자들을 핵발전소 경영진과 싸잡아서 비난할수록 핵발전소 폐쇄는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정부와 경영진들은 '노동자들 일자리를 위해서도 핵발전이 필요하다'며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챙기면서) 여론을 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대안은 핵발전소 폐쇄와 정의로운 전환을 함께 요구하며 그 노동자들을 우리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상호 토론 시간에 핵발전이 그나마 기후 위기를 막을 현실적 대안이라고 생각한다고 솔직하게 말씀해 주신 분도 계셨고, 그러기엔 핵발전이 너무 위험한 것 아니냐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두 분을 비롯해 소중한 의견을 공유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핵발전 없이 기후위기를 막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문제는 결국 '정말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아직까지 운동이 사회를 그만큼 바꿀 만큼 나아간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는 한 분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운동에 대한 지지가 계속 커져 왔고, 운동 자체도 더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왔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이런 추세가 보여 주는 것은 운동이 지금의 모습에서 머무르지 않고 더 위력적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발제 서두에 저는 아인슈타인 얘기를 해 드렸습니다. 말년에 아인슈타인은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과 공동 작성한 선언문에서 핵 폐기를 주장하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싸움을 그만둘 수 없다고 해서 그 대신에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1955년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아인슈타인은 핵 문제가 인류 사회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고 봤고 저는 그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발제와 상호토론에서는 그 점을 좀더 현대적으로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기후위기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대중운동에 있다는 것,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도 함께한다면 그만큼 앞당겨 그런 대중운동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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