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에서 4번에 걸친 세미나로 진행하는 '기후위기, 무엇이 문제이고 대안은 무엇인가?'에서 마지막으로 발표한 자료를 다듬은 것입니다. 이날 참석자들에게 사전에 배포한 읽을거리는 이 링크에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첫째 발표 자료(클릭)와 둘째 발표 자료(클릭), 셋째 발표 자료(클릭)는 각각 해당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시작하면서 영화 얘기를 짧게 할까 합니다. ‘매트릭스’라는 영화인데, 인공지능에 맞서 인간이 싸운다는 SF영화입니다. 이 영화에는 철학적 얘기가 참 많은데 그 중 한 장면이 오늘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쑥한 차림의 인공지능이 인간 혐오를 표현하는 장면인데 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곳에 있는 동안 깨닫게 된 사실이 있어
네 종족을 분류하다가 영감을 얻었지
너희는 포유류가 아니었어
지구 상의 모든 포유류들은 본능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데
인간들은 안 그래
한 지역에서 번식을 하고
모든 자연 자원을 소모해 버리지
너희의 유일한 생존 방식은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거지
이 지구에는
똑같은 방식을 따르는 유기체가 또 하나 있어
그게 뭔지 아나?
바이러스야
인간들이란 존재는 질병이야
지구의 암(癌, cancer)이지
저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외계인이 우리를 바라본다면 정말 저렇게 생각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환경 파괴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죠. 오늘의 주제, ‘마르크스주의가 생태 문제에 도움이 되나?’ 전반부는 저 내용을 다룰 것입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사회를 바꿀 전략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본성적으로 자연과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가 아닐까? 아니면 적어도, 오늘날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 즉, 생태적 수용 한계를 이미 넘어선 것이 아닐까?
이런 주장을 가장 극단으로 발전시킨 것이 맬서스주의 또는 신(新)맬서스주의라고 하는데,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맬서스의 이름에서 왔습니다. 맬서스주의는 위험한 함의를 갖고 있습니다. 강제적 산아제한, 복지 삭감 심지어는 인종청소나 전쟁을 지지할 수도 있죠. 실제로 맬서스는 양극화가 끔찍했던 18~19세기 영국에서 일체의 빈민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입니다.
당연히도, 평등과 복지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맬서스에 격하게 반대했습니다. 일부는 맬서스가 제시한 인구법칙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고 지적했고, 일부는 맬서스의 주장은 빈민에 대한 혐오일 뿐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철학적으로, 그러니까 맬서스의 전제를 뿌리째 논박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마르크스와 엥겔스였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논박은 작은 반론과 큰 반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작은 반론은, 맬서스의 주장대로라면 어떤 경우에도 적정 수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맬서스는 적정 인구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구가 과잉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고만 말했는데, 인구가 식량보다 더 빨리 늘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논리 대로라면 지구상에 인류가 처음 출현할 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과잉일 것입니다.
맬서스의 이런 한계는 오늘날 그를 높이 사는 사람들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신(新)맬서스주의는 이런저런 과학적 수치를 제시하면 맬서스의 주장을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1인당 물소비량이 얼마인데 지구 전체의 가용수(available water), 그러니까 사람이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의 총량이 얼마인지를 인공위성과 각종 탐사기술을 동원해 측정한 다음에 이를 1/n하면 적정 인구를 추산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리 산출이 까다롭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 소비량 문제로 말하자면, 사람은 물을 단지 마시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아주 단순했겠죠. 예컨대, 저는 마흔 살이 넘은 이후부터는 물을 하루에 다섯 잔, 그러니까 하루 1리터는 챙겨서 마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몸짱 영화배우들은 근육을 만들 때 물을 하루에 10리터까지 마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래 봤자 저와 10배 이내에서 차이가 나죠. 이렇듯 개별 인간이 직접 섭취하는 물만 따지면 비교적 작은 오차범위 안에서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씻는데도 물을 써야 하고, 빨래도 하고, 전기 생산에 필요한 발전기도 식혀야 하고, 우리가 먹을 식량을 생산한 농업에도 물이 필요합니다. 이런 물 소비량은 모두 사회적으로 결정됩니다.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사회의 지도자가 정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개별 인간은 분명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물 소비 패턴을 정하지만, 더 큰 틀에서 보면 개인이 내리는 선택은 사회가 제시한 것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한때 샤워를 즐기는 대신에 욕조에 물을 받자는 캠페인이 있습니다. 샤워하는 동안에 계속 물을 틀어 놓으면 물소비량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전업체들은 드럼용 세탁기가 통돌이 세탁기보다 물 소비량이 적다고 광고합니다. 식기세척기를 쓰는 것은 고무장갑 끼고 설거지 하는 것보다 물소비량이 적고, 풍력 발전은 열 발생이 적기 때문에 핵발전이나 화력 발전보다 물소비량도 적습니다.
그런데 사회적 소비량은 인간의 생물학적 소비량과 달리 매우 가변적입니다. 빨래와 설거지 같은 가사의 상당 부분을 개별 가정에서 분산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공공시설에서 집단적으로 해결하는 사회에서는 물 소비량이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이윤이 아니라 생태계와의 조화를 우선해서 물과 에너지 효율을 끌어올린다면 더욱 줄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물 소비량이 완전히 제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집단적으로 이뤄지느냐, 사람들이 얼마나 거기에 동참하느냐에 따라서 절감폭은 매우 커질 것입니다.
아까 마르크스가 맬서스를 반박하면서 작은 반론과 큰 반론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르크스 큰 반론의 출발점은 맬서스가 사회라는 핵심 변수를 고려하지 않았고, 대충 ‘이만하면 됐다’고 자기가 편한 대로 취사선택한 내용을 일반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맬서스와 달리 현대과학을 "존중한다"고 주장하는 신맬서스주의자들도 비슷한 오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위 <조선일보> 기사가 언급한 폴 얼릭(‘파울 에를리히’는 틀린 표기입니다)은 20세기의 맬서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1968년에 그는 인구 과잉으로 10년 안에 수백만 명이 식량 부족으로 아사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프리카 등지에서 기아로 죽는 사람들은 분명 있고, 그런 일을 줄이려면 식량을 지원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얼릭은 정반대로 주장했습니다. 그는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 식량은 물론이고 아무런 지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나라들에서 인구가 늘고 있기 때문에 어차피 헛수고라는 것이었죠.
가난이나 불평등한 식량 분배가 아니라 절대적 식량 부족 때문에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는 얼릭의 주장은 당연히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인구뿐 아니라 식량 생산량도 꾸준히 증가했고, 그의 책은 “지금껏 출판된 책 중 가장 엉터리”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습니다.(그런데도 조선일보는 40년이 지나서도 또 언급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틀렸을까요? 얼릭은 인류가 생태계에 가하는 부담을 다음의 공식으로 산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얼핏 보면 ‘1인당 GDP’나 ‘GDP당 오염물’이라는 형태로 사회를 고려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아닙니다. 저 공식의 메시지는 인구를 나머지 두 요소와 독립적인 독립변수로 본다는 것이고, 그래서 인구가 증가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파국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얼릭은 선진국의 아프리카나 개발도상국 지원에 반대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폴 얼릭은 기후 정의에 완전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인구가 독립변수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에는 ‘인간은 다른 동물과 뭐가 다른가?’라는 더 철학적인 논쟁이 깔려 있습니다:
- 마르크스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다르게 자신이 속한 공동체(=사회)를 목적의식적으로 바꾼다고 봤습니다.(그래서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의 물소비량 등은 생물학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결정됩니다.)
- 반면에 맬서스나 신맬서스주의자들은 인간이 태어난 조건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로만 간주합니다.
그래서 맬서스주의자들은 제한된 공간 안에서 세포나 동물들이 보이는 모습을 인간에게 적용하려 듭니다. 처음에 봤던 영상에서 인류를 묘사한 방식도 정확히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소모하는 존재로만 그려지고, 자연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배타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잘해야 적대적 공존입니다.
반면 마르크스는 원시사회부터 현대 자본주의까지의 변화를 통시적으로 보면서 사회가 꾸준히 변화해 왔고 그에 따라 인간과 자연도 바뀌었다고 강조했습니다. 1만 년 전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그 이전까지 없던 변화를 생태계에 일으켰고 그에 따라 자연도 변했습니다.
예컨대, 오늘날 지중해 분지 지역은 열대 지역 다음으로 생물다양성이 가장 큰 “생물 다양성 핫스팟”인데, 그 이유는 바로 인간 덕분입니다. 인류가 계단식 농경 등 수천 년에 걸쳐 자연을 변화시키며 토양 침식을 막은 결과입니다.
(더 자세한 설명은 《기후 위기, 불평등, 재앙》에 수록된 이언 라펠의 논문 '거주 가능 지구: 생물 다양성, 사회, 재야생화'를 보세요. 난이도는 있지만 제가 강력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이렇듯 마르크스의 생태적 관점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를 통해 자연을 변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사회도 다시 변화합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의 환경파괴는 인류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사회가 운영되는 방식, 즉 자본주의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입니다.
오늘날 기후운동 안에서 ‘나는 맬서스주의자요’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맬서스는 너무도 악명 높은 빈민 혐오론자였거든요. 다행히도 기후 운동은 전반적으로 평등을 지향하고 또 진보적입니다.
그러나 맬서스주의와 달리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이고 기후 정의를 지지하지만, 철학적으로는 똑같은 문제를 공유하는 관점은 기후 운동 안에서도 흔합니다. 도넛 경제나 ‘우주선 지구’라는 생태 모델이 그런 경우입니다.
- ‘우주선 지구’란, 지구가 하나의 우주선처럼 제한된 수용량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한계는 지구의 절대적 한계가 아니라 사회적 한계인데도 ‘우주선’이라는 모형, 즉 인류가 벗어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조건이라고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 도넛 경제란, 생태적 한계를 나타내는 바깥쪽 원과 사회 안전망을 나타내는 안쪽 원이 사이에 제한된 공간이 존재하고 있고 인류가 이 안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취지는 좋지만, 도넛 경제가 도넛 모양인 이유는 바깥쪽 원(생태적 한계)은 안쪽 원(사회 안전망)이 분리돼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생태적 한계와 사회적 한계는 완전히 별개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온실가스만 하더라도, 물리적으로 규정된 절대적 한계가 있는 듯 보일 수 있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가 배출하는 온실가스량은 그 사회가 화력발전이냐 풍력발전이냐에 따라서 현격하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온실가스 문제도 절대적 한계가 아니라 사회적 한계에 속하는 것입니다. IPCC 등 수많은 과학자들은 생태적 범위 안에서 온실가스를 줄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문제는 사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선 지구와 도넛 경제 생태관에서는 자연이라는 블록과 인간이라는 블록이 따로 있고, 둘은 근본적으로 배타적 관계에 있고, 역시 잘해야 적대적 공존입니다. 그래서 맬서스주의와 철학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이 처음부터 자연의 일부였고, 지구의 생태적 한계는 인간이 사회와 자연을 조화시킬 수 있는 역량에 달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마르크스주의는 생산력주의 아니냐' 하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분명 소련이나 중국은 지독한 생산력주의였고 저는 그런 사회가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련에서든 중국에서든 가장 단호한 반체제 인사들은 다름 아닌 마르크스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나 레닌, 트로츠키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향한 사회도 생산력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생산력주의의 대표 주자는 빌 게이츠나 일론 머스크, 시진핑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기후 위기를 해결하자고 말하지만 그 대안은 더 많은 경제성장으로 효율을 끌어올리자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최적화, 효율은 이윤을 위한 것이지 인간과 자연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는 효율이 곧 낭비이고, 효율이 곧 비효율이라는 역설이 존재합니다. 이윤과 경쟁이라는 관점에서는 효율이지만 인간과 자연의 필요라는 관점에서는 낭비이자 비효율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볼까요? 첫째, 자본주의에서는 무기나 광고, 요란한 포장지처럼 오로지 군사적, 상업적 경쟁을 위한 생산이 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특히 군비 지출은 201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빠르게 늘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더욱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낭비입니다. 이미 1970년에 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는 미국 GDP의 61퍼센트가 이런 낭비적 생산이라고 추산했습니다(관련 포스트). 국가간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자리잡은 국제 사회에서라면 모두 사라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둘째,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을 아무도 총괄하지 않는 탓에 사회 전체의 수요와 공급이 크게 어긋나기 일쑤입니다. 지금 세계 경제의 화두는 반도체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삼성전자 영업이익률이 90퍼센트가량 줄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반도체 생산은 어마어마한 자원을 쓰면서도 수율은 지독하게 낮기로 악명 높습니다. 최첨단 반도체 생산의 대표주자인 대만 TSMC의 수율은 5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될 것이라고 합니다.(2개 만들면 하나는 버리는 셈이죠.) 그런데도 국제 뉴스를 보면 미국과 일본, 유럽이 앞다퉈서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잉 생산과 중복 투자는 시장 경제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셋째, 자본주의에서는 각 생산자가 협소한 이해관계만을 좇는 탓에 사회 전체적으로는 좋은 게 분명할지라도 이윤 경쟁에서 밀리면 친환경 기술이 선택받지 못합니다. 재생가능에너지가 그 중요도에 비해 수십 년째 적게 투자되는 이유이고, 반면에 핵무기로 전용이 가능한 핵발전에는 무수한 돈이 몰리는 이유입니다.
결국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아니라, 기후와 생태계를 섬세하게 고려하는 계획 경제, 즉 사회주의 사회에서라면 낭비를 크게 줄이면서도 자연과의 조화로운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지난주 상호토론 시간에 ‘그런데 그런 사회가 가능할까요?’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개념적으로는 사회를 통째로 바꾸면 핵발전도 없고, 빈곤도 없고,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지만 과연 사회를 그렇게 바꿔낼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남은 시간에는 그 질문에 답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 자체는 마르크스주의자들만의 주장이 아닙니다. 관건은 어떻게 바꿀 수 있냐는 것이죠. 지난 세 번의 발표 동안 저는 기후 위기 문제에서 이해관계를 중심에 놓고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녹색자본주의에 기대를 걸 수 없는 이유도 인류가 이해관계에 따라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고, 기후 정의를 실현하려면 피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싸워야 하고, 핵발전과 방사능의 진실도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제시된다고 설명 드렸습니다.
그리고 사회를 바꾸는 데서도 이런 이해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핵심 주장입니다. 이번 4주에 걸친 연세대 세미나 동안 저는 기후 위기가 이해관계의 문제라고 강조해 왔는데, 마찬가지로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경제 위기에서도 그런 이해관계의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전쟁에서도 이해관계가 나뉘고, 코로나19와 여성차별, 성수자와 장애인 차별에서도 이해관계가 나뉜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이해관계가 나뉘는 구체적 양상은 분야마다 다르고 그것들은 별도의 분석과 설명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공통점은 그 모든 쟁점에서 이해관계가 나뉘는 패턴이 바로 계급에 따라 나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급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투쟁하면 여러 운동들이 각개약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운동으로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이 분야를 불문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물론 모든 운동이 연대의 대상인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①난민을 쫓아내자는 운동도 있고, ②한전 적자를 줄이기 위해 전기요금을 올리자는 운동도 있습니다. 또한 ③소득 상위 50퍼센트는 세금을 더 내자는 운동도 있습니다. 방금 예를 든 세 가지 운동 중 두 가지(②,③)는 진보 진영에서 제기하는 운동이지만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는 지지하기 어렵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피지배계급 전체의 이해관계를 옹호하지만, 막강한 권력자들과 기업들에 도전할 힘은 피지배계급 중에서도 노동계급에게만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의 체제가 자본주의인데,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에 불비례하게 크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에 등을 돌리게 만드는 것은 다른 피지배계급들의 반란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노동계급이 공장 노동자만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사, 플랫폼 노동자 심지어 얼마 전에 대규모 시위를 벌인 간호사들의 상당 부분도 노동자들입니다. 반면, 자영업자들은 분명 노동계급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영업자 다수는 피지배계급이지만 최저임금 인상처럼 자영업자와 노동계급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절충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이익을 주장합니다. 그것이 더 크게 보면 전체 피지배계급의 이익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후 위기가 이토록 심각한데 사회는 마냥 잠잠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환경 운동 안에는 많습니다. 특히 기후변화 원포인트 단일 쟁점으로 활동하는 분들이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저는 그 분들이 대단히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이태원 참사에 항의하는 대규모 운동이 있었고, 그 직후에는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고, 올해에도 건설 노동자들이 노조 탄압에 항의해서 싸우고 있고, 깡통전세와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이대로 쫓겨날 수 없다고 싸우고 있습니다. 사회가 지금 잠잠하다는 생각은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후변화랑 상관 없잖아요?’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생태 위기, 경제 위기, 전쟁 위기가 중첩되는 요즘 시대에는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많고 이들이 모두 기후 위기 대응의 잠재적인 아군입니다. 관건은 각각의 운동이 공통의 이해관계를 자각하고 단결하느냐 마느냐이지 운동이 있네 없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운동들이 만나려면 각 운동의 이해관계를 싱크(sync)하는 것, 동조화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저는 20대에 장애인 이동권 운동에 함께했는데, 거기서 인상적으로 들은 말 하나가 ‘우리 장애인들이 불쌍해서 오는 게 아니라 우리의 투쟁이 여러분의 해방도 앞당긴다는 관점에서 연대해 달라’였습니다. 그리고 각 분야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런 연대가 가능하다고, 즉 상이한 운동이 단결할 수 있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기후 운동 안에는 정반대의 접근법도 있습니다. 바로 기후 위기 앞에 다른 모든 이해관계를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번 세미나 기간 중 한 분께서 질문하셨던 탈성장론에 바로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탈성장론이란 경제 성장 자체가 환경을 파괴하므로 우리 모두 성장을 포기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가난해지자”라는 구호가 그 정신을 잘 표현합니다. 최근에 탈성장론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일본의 급진적 학자 사이토 고헤이는 하루 10달러(《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p366), 즉 1만 2000원에 만족하자고 말합니다.
이런 탈성장론은 자본주의의 환경파괴가 문제라고 지적하고 이는 백 번 정당하지만, 사실상 '우리 모두 가난해지자'고 주장하는 바람에 다른 운동과 연대할 가능성을 스스로 끊어버립니다.
그런 주장이 아니라 기후 위기와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결합시키는 주장을 펼쳐야 합니다.
- 예컨대, 석탄과 가스 발전소 가동을 당장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동시에, 그동안 화석연료를 태워서 돈을 번 기업들에게 책임을 물어 평범한 사람들의 소비와 일자리 마련에 필요한 비용을 거둬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 또한 다가오는 폭염에 가정용 에너지 요금을 올릴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을 줄이고 가정용 에너지 요금은 대폭 낮추라고 요구하고, 이왕이면 무상공급이 더 좋을 것입니다. 단지 에너지만이 아니라 에너지 효율이 좋은 에어컨과 단열이 잘 되는 창문 샤시, 그리고 요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주택도 책임지고 보급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 그럴 돈이 어디서 나오냐고요? 단기적으로는 정부가 국방비와 핵발전에 쏟아 붓는 돈만 중단해도 마련할 수 있고, 중기적으로는 기업들이 시장 경쟁한다고 자행하는 말도 안 되는 낭비를 줄여서 마련할 수 있고,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를 타도해서 지속가능한 경제로 넘어가야 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아이작 뉴턴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에 더 멀리 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기후변화가 불러올 위기와 그 위기에 대응할 운동을 이끌려면 우리도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야 합니다.
기후 정의 운동은 아직 키가 작지만, 그 곁에는 노동계급의 투쟁이라는 거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연관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운동의 결합을 추구할 때 더 강력해지고 기후 위기를 막을 사회적 힘을 비로소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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